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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옥포대첩 기념공원의 봄과 오류

by 실비단안개 2019.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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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6일

공곶이 구경후 어디로 갈까 하기에 이제 집으로 갑시다 하니, 대금산 진달래가 효과가 좋았나 보네 하며 거제 시내로 접어 들더니 옥포대첩기념공원에 가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거제 방문시 기념탑을 항상 봤지만 아직 한 번도 방문을 하지 않았기에 그러자고 했습니다.

팔랑포 마을을 지나는데 도롯가에 이순신 장군의 작은 동상들이 줄줄이 서 있었습니다. 조명이 아닐까 했지만 나중에 다시 찾지는 않았습니다.

그 길은 '충무공 이순신 만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으로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합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하면 일반적으로 정유재란까지 포함시켜 말합니다.
옥포해전은, 무방비 상태의 조선이 일본의 수군을 맞아 벌인 최초의 해상 전투이자 승전입니다.

 

1592년(선조 25) 4월 일본군이 부산진과 동래를 함락하고 계속 북상하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은 율포만호 이영남(李英男)을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이순신은 포구에 있던 수사(水使)들을 여수 앞바다에 모아놓고 의견을 수합하여, 여수 좌수영을 떠나 거제 앞바다에 가서 원균의 군사와 합세하기로 결정했으며, 이어서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게 급사를 보내 원균의 군사에 함께 가담할 것을 연락하고 이를 조정에 알렸습니다. 5월 5일 이른 아침 출항하여 이튿날 전라·경상 양도의 모든 장수들이 한산도에서 합석하여 작전계획을 짜고 송미포(松未浦)에서 결진했습니다.

* 송미포 : 지금의 거제시 남부면 다대리
7일 전함대가 동시에 출항하여 옥포 앞바다에 이르러 전열을 가다듬고 일제히 포구를 향하여 공격을 시작했는데, 이때 왜선 50여 척은 선창에 정박하고 일본군들은 포구로 들어가 분탕질을 하고 있었는데 조선군이 급습을 가하니 일본군도 대포와 활로써 대항하여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결국 일본군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도망치고, 조선군은 승리를 거두어 왜선 26척을 격파하고 포로가 되었던 조선인 3명을 구출한 해전이 옥포해전입니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이순신 장군이 첫 승전을 거둔 옥포해전을 기념하고 충무공정신을 후세에 계승하기 위해 옥포만이 내려다보이는 거제시 옥포동 산 1번지 일원에 약 109,000m²의 규모로 옥포대첩기념공원을 조성했습니다. 공원 내에는 30m 높이의 옥포대첩기념탑과 참배단, 옥포루, 기념관, 이순신 장군 사당 등이 있습니다.
옥포대첩기념탑과 옥포정은 본래 옥포조선소(현재는 대우조선해양)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1973년 옥포조선소가 기공됨에 따라 1974년 옥포대첩기념탑과 옥포정을 조선소 부근 거제시 아주동 탑곡 마을로 옮겨지었습니다.
그러나 부지가 좁고 위치도 적합하지 않아 다시 이곳 옥포동에 부지를 확보하여 옥포대첩기념공원을 조성하면서 기념탑과 누각을 세웠습니다. 1991년 12월 20일 기념공원 사업을 시작하여 1996년 5월 15일 준공했고, 6월 22일에 옥포대첩기념공원이 개원되었습니다.

 

나름 군항제 기간에 뜻 깊은 참배같아 옥포대첩기념공원을 방문했는데 그 사이 군항제도 끝났으며, 이순신 장군 탄신일이 4월 28일인데 그때까지는 기다릴 수 없어 올립니다.

관람료는 없었으며 관람시간은 오전 09시 ~ 18시까지였습니다. 관람도중 차를 빼라는 관리인의 요구가 있었기에 사당은 참배를 하지 못 했습니다.

사당인 효충사와 기념관, 기념탑이 보입니다.

 

 

사당과 기념관 사이에는 이제 연두빛잎이 돋는 큰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연한 나뭇잎 사이로 지는 해를 봤습니다.

 

사당인 효충사는 나중에 방문하기로 하고 우선 기념관으로 가는데, 기념관 화단에는 벌써 목단이 피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진해에도 목단이 피었지만 당시에는 피지 않았기에 공곶이에 이어 역시 거제는 봄이 빨리 오는구나를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전시관 입구에는 고성종 님의 작품 '옥포대첩의 해질녘'이 모든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옥포대첩의 해질녘은 나라를 사랑하고 투철한 애국애족이 담긴 민족의 거룩한 쾌거의 역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옥포대첩의 해질녘 아래에는 전술비연(신호연)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 신호연은 오늘날과 같이 무전기나 무선통신 등이 없었던 420년 전인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께서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는데 통신 및 암호 수단으로 사용했던 연입니다.

 

 

1전시실입니다.

전시실에는 임진왜란 개괄 설명, 왜군 침략 경로도, 임진왜란 유물, 이순신 영정도 등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영정도입니다. 뒤에는 조선 수군의 복장입니다.

 

 

전시관에 들기전에 '어린이 체험학습실'이 있었는데 어린이들의 소원이 나비와 함께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꼭 같은 나비는 없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무기와 조선과 일본의 전함비교도입니다.

 

 

1전시실을 나와 난간에 서면 옥포 조선소와 양지암 등대가 보입니다.

 

 

 

2전시실입니다.

2전시실에는 옥포대첩의 개요, 임진왜란 주요해전도, 옥포대첩 유물, 대동여지도(옥포만), 양지암 등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진해에는 임진왜란 3대 승전지가 있다보니 해전도를 눈여겨 보게 됩니다. 옆의 바위는 양지암으로 양지암에 왜군초소가 있어 옥포만 진입이 어려웠다고 합니다. 옥포해전이 일어나는 당시 해무로 인해 우리 수군의 진입을 왜군 초병이 늦게 발견했다고 하는데 옥포대첩의 승리 요인중 하나입니다.

 

 

임진왜란 주요해전도입니다.

1차 옥포해전에 이어 합포해전입니다. 합포는 마산 합포가 아닌 진해의 합포(합계, 학개)입니다.

옥포에서 승리한 뒤 거제도의 영등포(永登浦) 앞바다에 결집하여 밤을 새우려고 했는데, 멀지 않은 곳에 일본군 대형선 5척이 지나간다는 급보를 듣고 출동했습니다. 조선 수군의 추격을 받고 달아나던 일본군은 합포바다에 이르자 육지로 올라가 조총을 쏘아대기 시작했으며, 이순신 함대는 사정거리 밖에서 정세를 살피다가, 배를 몰아 포구 안으로 들어가 일제히 급습했습니다. 우척후장 김완(金浣), 중위장 이순신(李純信), 중부장 어영담(魚泳潭) 등이 일본군의 대형선 4척과 소형선 1척을 분파하는 등 승리를 거두었는데 합포해전입니다.

1592년(선조 25) 5월 7일 이순신(李舜臣)과 원균의 연합함대는 옥포·합포 해전에서 31척의 일본수군을 분파한 후 창원 남포 앞바다에 진을 치고 승리의 기쁨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8일 이른 아침에 진해 고리량[경남 마산시 구산면 구복리와 저도(돝섬) 마을을 연결하는 일명 콰이강의다리 근처가 진해바다]이라는 곳에 일본 함선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접합니다. 이를 치기 위해서 남포 조선수군은 앞바다를 출발하여 돼지섬[猪島:지금의 경남 마산시 구산면]을 지나 적진포[지금의 경남 통영시 광도면 적덕리]에 다다랐는데, 그곳에서 일본군은 대중형 함선 13척을 정박시켜 놓고 민가들을 습격하며 분탕질을 자행하고 있었습니다. 조선군은 이순신의 지휘하에 도망가는 적을 추격했으며, 대선 9척과 중선 2척을 파괴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는 옥포·합포 해전에 이어서 거둔 해전에서의 3번째 승리로 조선수군이 해전에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순신은 5월 23일 가선대부로 승서되었습니다.

 

 

그런데 옆의 해전도에는 진해 합포가 아닌 마산 합포만이 '합포'로 명명되어 있었습니다. 검색을 하니 위의 중요 해전도도 2016년 이전에는 마산 합포만을 합포라고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수정하는 과정에서 이곳의 오류는 빠뜨렸나 봅니다.

마산박물관의 합포해전지를 보고 합포해전지에 유독 민감해졌는데 합포해전지는 진해 풍호동 학개마을입니다.


마산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의 논리 중 하나는 영등포에서 마산 합포까지의 거리가 약 20km 쯤 되니 시속 6km로 간다면 3~4시간이면 충분하다고 보더군요. 그런데 그런 직선거리하고 실제 항로하고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만약 마산 합포에서 해전을 했다면 인근에서 정박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정박시설이 충분하니까요.
웅천땅 합포는 좁기 때문에 정박할 수가 없어서 건너편 남포로 이동하여 정박하여 밤을 보냈죠.
마산박물관의 합포해전지 오류를 거제에서 다시 만날 줄을 몰랐습니다.

진해 합계마을입구에는 합포해전비가 있는데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합포 해전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의 두 번째 해전으로 1592년 5월 7일(음) 저녁 무렵 현재의 경남 창원시 진해구 풍호동 행암 학개마을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1592년 5월 7일 오후 이순신이 이끈 전라좌수군(판옥선 24척)과 원균이 이끈 경상우수군(판옥선 4척)이 합동으로 옥포해전에서 적선 26척을 분멸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영등포 앞 바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중 오후 4시쯤 왜선 5척(대선4, 소선1)을 발견했다는 척후장의 보고를 받았다.

이에 이순신 휘하 전라좌수군들은 출전하여 웅천땅 합포(현재의 진해 풍호동 학개)에 이르러 왜선 5척을 모두 분멸시켰다.

세부 전공을 보면 사도첨사 김완과 방답첨사 이순신 광양현감 이영담이 각각 대선 1척씩을, 전 첨사 이응화가 소선 1척을, 이순신의 군관인 봉사 변존서, 송희립, 김효성, 이설 등이 힘을 합해 대선 1척을 분멸시켰다.

합포해전은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의 제1차 출전에서 두번째로 벌어진 해전이며 현재의 창원(진해구)에서 벌어진 최초의 해전이다. 당시 육전에서 연패를 당해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 상황을 맞은 시점에서 해전 승리를 통해 임진왜란 극복의 자신감을 수군이 제공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전시실에는 유명한 학익진법이 모형배를 이용하여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학익진전법은 학이 날개를 편 형태의 해상전술로 일자 형태를 취하고 있다가 적이 공격해 오면 중앙의 부대는 뒤로 물러나고 좌우의 부대는 앞으로 나가 반원 형태로 적을 포위하여 공격하는 전술입니다.

 

 

전시관 밖에서 먼 양지암 등대를 다시 한 번 확인했으며 아래를 보니 목단이 보였으며,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삼지닥나무 너머로 사당이 보였습니다.

 

 

 

 

이제 옥포대첩 기념탑으로 갑니다.

 

 

 

해가 지고 있었기에 역광이라 기념탑 정면이 제대로 나오지 않기에 여러 각도에서 찍었습니다. 기념탑 높이가 30m다보니 여러 각도에서 탑 전체가 다 나올 수는 없었습니다.

 

 

 

옥포조선소도 보입니다.

 

 

 

기념탑 뒷면의 기념탑 비문입니다. 아래에 작은 글씨가 있어서 확인을 하니, '이 비문 상당부분은 2003년 태풍(매미)으로 인하여 파손된 것을 재복원하였습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여기는 당시에 큰피해 없었는데 거제도는 피해가 상당했던 모양입니다. 매미성도 태풍 매미로 경작지가 피해를 당해 짓고 있다고 했으니까요.

 

 

기념탑 뒷쪽에는 참배단이 있었습니다. 묵념!

 

 

참배단쪽에서 찍은 기념탑입니다.

 

 

옥포루입니다.

옥포정은 본래 옥포조선소(현재는 대우조선해양)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1973년 옥포조선소가 기공됨에 따라 1974년 옥포대첩기념탑과 옥포정을 조선소 부근 거제시 아주동 탑곡 마을로 옮겨지었습니다.
그러나 부지가 좁고 위치도 적합하지 않아 다시 이곳 옥포동에 부지를 확보하여 옥포대첩기념공원을 조성하면서 기념탑과 누각을 세웠습니다.

역시 지는 해로 인해 뒷모습부터 찍었으며 참배단 참배후 내려오면서 앞모습을 찍었고 양지암 등대도 다시 한 번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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