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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晉州城] 풍경

by 실비단안개 2006.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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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晉州城]

 

사적 제118호. 1963년 지정. 일명 촉석성()이라고도 한다. 본래 백제 때의 거열성지()였다고 하며, 고려 말 공민왕() 때 7차례 중수되고 왜구 방비의 기지로 사용되었다. 내성의 전체 넓이 200m2, 둘레 약 600m, 외성의 둘레 약 4km이다.

임진왜란 때는 김시민() 장군이 왜군을 대파하여 임란3대첩() 중의 하나가 벌어진 곳이며, 1593년 6월 왜군의 재침시에는 군관민 6만이 최후까지 항쟁, 장렬한 최후를 마쳤으며, 이 때 논개()는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였다. 기록에 보면 1605년(선조 38) 병사(使) 이수일()이 진()을 성내로 옮기고 성이 너무 넓어 수비가 곤란하다 하여 내성을 구축하게 되었는데, 성은 자연 촉석루를 중심한 현 진주공원 일대의 외성과 현재의 성내동() 주변 내성의 둘로 나눠지게 되었다. 그 뒤 병사 김태허()가 1607년 포루() 12개를 증축하였고, 18년(광해군 10) 병사 남이흥()이 성 수축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지금의 진주성은 대략 이 때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네이버 백과)

 

 

 

▲ 촉석루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8호. 정면 5칸, 측면 4칸. 고려 말의 진주성(晉州城)을 지키던 주장(主將)의 지휘소이다. 1365년(공민왕 14)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왜적이 침입하자 총지휘는 물론 남쪽 지휘대로 사용하였으므로 남장대(南將臺)라고도 하였다.

촉석루에 관한 기록을 보면 《진양지(晉陽誌)》에 고려 때 김중선(金仲先) 등이 진주성 수축시 신축하였다고 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김주(金湊)가 영남루(嶺南樓)를 중건할 때 촉석루를 본보기로 하였다고 되어 있다. 누기(樓記)에는 조선 초 목사 권충(權衷)과 판관 박시결(朴時潔)이 중건하고 하륜(河崙)이 누기를 지었다고 되어 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의기 논개가 낙화(落花), 순국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현재의 건물은 1973년에 재건된 팔작지붕의 와가(瓦家)이다.

 

 

 

▲ 의암

 

진주대첩과 의암

'행주대첩'과 '한산대첩', '진주대첩'을 임진왜란 3대 대첩이라고 한다. 1593년 2월 행주산성에서 전라감사 권율의 지휘에 의해 승리를 거둔 '행주대첩'과 1592년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거북선과 수군에 의해 승리를 거둔 '한산도대첩', 그리고 이곳 진주성에서 치러진 싸움을 가리켜 '진주대첩'이라 한다. 진주성싸움은 1592년(선조25년)과 1593년에 있었던 싸움으로 김시민 장군의 지휘 하에 승리를 거둔 1차 전투가 '진주대첩'이며 진주성에는 1, 2차 전투와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 발발 후 왜는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차지하기 위해 영. 호남의 관문인 진주성을 공략한다. 1592년 10월 왜장 나가오카는 3만 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격해왔고 진주성의 김시민 장군이 3,800여명의 관, 군, 민을 지휘하여 7일간 전투를 벌여 우리가 이겨냈다.

다음해 1593년 6월.. 전쟁이 소강상태로 빠진 상태에서 1차 진주성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10만 여명을 이끌고 왜가 다시 쳐들어왔고 우리는 3,500여명의 군사와 6만 여명의 주민이 사투를 벌였으나 11일간의 전투 끝에 패하고 말았다. 2차 진주성전투는 조총과 귀갑차를 앞세워 총력을 벌였던 왜에 밀려 패하고 말았는데, 진주성을 초토화시키라는 도요토미의 명령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2차 전투를 승리하게 된 왜군은 "촉석루"에서 자축연을 열었고 논개가 촉석루 앞 "의암"에서 왜장을 껴안고 물에 뛰어든 것이다.


<진주성>은 삼국시대에 처음 토성으로 만들어졌으며 왜구의 침범에 대비해 석성으로 고쳐 쌓았는데 남쪽엔 남강이 서쪽은 청천이 북쪽은 못이 있고 사방으로는 절벽을 이루어 성곽으로서 좋은 조건을 가졌다. 성의 둘레는 1,320미터고 높이는 5~8미터이다. 진주성 안에는 촉석루와 촉석문, 북장대, 서장대, 창렬사, 호국사, 영남포정사문루 등이 있으며 1975년경에 성곽을 보수하였다.

촉석문과 촉석루 사이에는 진주성전투에 쓰였던 대포인 천자총통과 지자총통, 현자총통이 나란히 세워져 있으며 간략한 설명문도 함께 있다. 대포가 천자나 날아간다 하여 붙여진 천자총통보다 크기가 작은 순서대로 천. 지. 현. 황을 써서 이름이 정해진다고 한다.

강 가운데 돌이 오뚝 오뚝 솟아있다 하여 붙인 "촉석루"는 진주성의 대표적인 명승지로서 전쟁 발발 시에는 주장이 병졸을 지휘하던 장소로 쓰였으며 평소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거나 과거시험을 보던 장소로 이용됐다. 촉석루를 다른 이름으로 '남장대' 또는 '장월루'라 부르기도 했다. 고려 고종28년(1241년)에 창건된 이후 여러 차례 중건, 중수를 했다가 1950년 6.25 동란으로 불탔던 것을 1960년 진주 고적보존회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촉석루" 바로 앞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의암" 바위와 함께 "의암사적비"가 있다.
의로운 바위 라는 의미의 의암은

손가락이 미끄러질까 봐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왜장과 함께 죽은 논개의 충절은 "의암" 옆에 서있는 "의암사적비"에도 잘 나타나있다.

충렬실록(경종2년 1722년)에 쓰여진 글을 해석한 것이 왼편에 세워져있는데 마지막 구절인 '유독 가파른 그 바위에 그녀 홀로 우뚝 서 있도다. 그녀가 그 바위 아니었다면 어찌 죽을 곳을 얻었겠으며 바위인들 이 여인이 아니었다면 어찌 의롭단 소리를 듣겠는가? 이 남강가의 높다란 바위에는 만고의 꽃다운 마음이 서려 있도다'라는 글이 마음을 적신다.

"의암"은 높이와 너비가 약 3미터 정도가 되며 조금씩 움직여 촉석루 쪽 절벽에 들러붙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는데 절벽에 와 닿으면 큰 재앙이 난다는 전설을 가져 위암(危岩)이라고 했다가 논개로 인해 의암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촉석루로 올라가 왼편으로 가면 논개 영정이 그려진 "의기사"란 이름의 논개 사당이 있어 숙연함을 더한다. (출처 : '바위 이야기' -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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